성경 원문 강해

[골로새서 헬라어 좋은 성경말씀]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골 1:18-23)

엘벧엘 2021. 12. 7. 12:20
반응형

골로새서 1장에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세워졌습니다. 주님께서도 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을 구원하고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만 전해야 합니다. 인간의 말을 전하거나 세상의 말을 전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높여져야 하고 예수님만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머리인 예수님(골 1:18-23)

 

18절 카이 아우토스 에스틴 헤 케팔레 투 소마토스 테스 엑클레시아스 호스 에스틴 아르케 프로토토코스 에크 톤 네크론 히나 게네타이 엔 파신 아우토스 프로튜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성도들  상호 간의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와  통일성을  강조하곤 했다(롬 12:4,5; 고전 12:12-27).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몸으로서의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사면받고 성도가 된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본질적으로 설명해준다. 성도들은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는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갖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는 매우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더불어 그의 생명을 공유한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음으로써만 삶을 얻을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권자로서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주권자인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함으로써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

   그가 근본이요 - 그리스도가 '근본'이 된다 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또한 성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존해서만, 그리스도에 근거해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시다.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으뜸'(케팔레)이라는 말은 만물과의 차별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인 바, 이 차별성은 상대적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차이이다.

19절 호티 엔 아우토 유도케센 판 토 플레로마 카토이케사이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 본절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본문의 주어가 '하나님'이냐 '충만'이냐 하는 것과 '충만'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주어로 취하고 있는 반면, RSV는 '충만'을 주어로 삼고 있다. 적어도 문법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충만'을 주어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다음절(20절)의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다'에 대한 주어도 '충만'이 되어야 하는데 바울의 신학에서 화목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충만'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보는 것이 문맥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충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는 그 의미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기 때문에 해석이 분분하다. (1) '의와 지혜와 권능 그리고 모든 축복의 충만'이다(Calvin). (2) '은혜의 충만,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모든 부요함'이다(Eadie, Alford). (3) '매우 충만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Moule). (4) '하나님의 온전하신 본성'이다(Phillips, Lightfoot). 이러한 견해들은 서로 상치(相馳)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성을 보인다. 2:9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속성과 권능의 충만'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20절 카이 디 아우투 아포카탈락사이 타 판타 에이스 아우톤 에이레노포이에사스 디아 투 하이마토스 투 스타우루 아우투 디 아우투 에이테 타 에피 테스 게스 에이테 타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1:20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충만하게 임했다는(19절) 그 충만함은 하나님과 만물을 화해하게 할 수 있는 자격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예수의 단순한 중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쳐 피 흘림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화평을 이루사'의 헬라어 '에이레노포이에사스'는 과거분사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루신 평화가 단번에 된 것임을 나타낸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긴 화해의 효력은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예수의 희생이 가져다주는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동적으로 화해에 참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예수 희생의 효력이 무제한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거역하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고 화해의 은총을 거부한다면 그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다.

21절 카이 휘마스 포테 온타스 아펠로트리오메누스 카이 에크드루스 테 디아노이아 엔 토이스 에르고이스 토이스 포네로이스

=====1:21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 앞에서는 예수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면 본문에서부터는 그것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먼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다. 예전 골로새 교인들의 실존은 '멀리 떠나'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으로 규정된다. 그 멀어진 거리의 공간에는 악한 행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다. 여기서 '악한 행실'과 '마음으로 원수 됨'의 순서에 유의해야 한다. 즉 악한 행실의 결과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됨으로 해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악한 행실'이었다는 것이다(Vaughan).

22절 뉘니 데 아포카텔락센 엔 토 소마티 테스 사르코스 아우투 디아 투 다나투 파라스테사이 휘마스 하기우스 카이 아모무스 카이 아넹클레투스 카테노피온 아우투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 '이제는'이라는 전환 문구로 인도되고 있는 본절은 '하나님과의 원수 됨'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로의 변화를 말한다. 바울은 이 전환의 중심에 예수의 피 흘림이 있었음을 이미 말한 바 있다(20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피 흘림'을 '육체의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육체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골로새 교회에 유입되거나 주변에 유포(流布)되었던 이단적 사상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육체를 입은 존재가 아니라 천사에 비견되는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만 매개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인 바, 바울은 그들을 겨냥해서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Bruce). 아울러 바울은 본문을 통해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그런 이단 사상에 말려들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Martin).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예수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화해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은 실제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해의 실질적 효력 발생으로 하나님의 '칭의' 선언이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현재적인 것이냐 미래적인 것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적이나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Bruce).

23절 에이 게 에피메네테 테 피스테이 테데멜리오메노이 카이 헤드라이오이 카이 메 메타키누메노이 아포 테스 엘피도스 투 유앙겔리우 후 에쿠사테 투 케뤼크덴토스 엔 파세 테 크티세이 휘포 톤 우라논 후 에게노멘 에고 파울로스 디아코노스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물론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신앙생활을계속해야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본문을 미래적인 것에 대한 조건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저자 바울의 확신에 찬 표현으로 보고 있다(Nicholson, Radford).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앞절(22절)에서 말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위해서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바로 서는 일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 된다. 여기서 '믿음'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요, '복음의  소망'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든 믿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 '천하 만민'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복음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본 구절이 수사적 과장의 표현도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6절에 표현된 것처럼 당시 복음이 계속하여 널리 전파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O'Brien). 즉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고립된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복음이 하나님께 기원(起原)하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정한 것임을 말해준다(Bruce).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 이것은 거짓 복음의 전파자들과 바울 사이에서 혼동하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전한 '소망의 복음'(23절)과 만민에게  전파된 보편적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도요 일꾼이었다.

[빌립보서 헬라어 주석 성경말씀] 천국을 소망하는 사도 바울(빌 1:19-30)

 

[빌립보서 헬라어 주석 성경말씀] 천국을 소망하는 사도 바울(빌 1:19-30)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상황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바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el-bethel.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