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상황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바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더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더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니 세상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가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도 바울(빌 1:19-30)
19절 오이다 가르 호티 투토 모이 아포베세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디아 테스 휘몬 데에세오스 카이 에피코레기아스 투 프뉴마토스 이에수 크리스투
=====1:19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바울이기뻐한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이것이...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이것'(투토)은 복음 선포를 위해 바울에게 나타난 모든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구원'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빌립보 교인들이 다시 만날 재회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26). (2) 혹자는 영적인 구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25절의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과 23절의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의 표현으로 보아, 바울이 현재적인 자기의 놓임과 미래의 구원을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구원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진술한다.
(1) 너희 간구 - 바울은 믿음의 기도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기도를 의지한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 -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이 필요로 하는 생명의 원리를 공급(供給)하시고 인도하신다(요 15:26;롬 8:26).
20절 카타 텐 아포카라도키안 카이 엘피다 무 호티 엔 우데니 아이스퀸데소마이 알르 엔 파세 파르레시아 호스 판토테 카이 뉜 메갈륀데세타이 크리스토스 엔 토 소마티 무 에이테 디아 조에스 에이테 디아 다나투
=====1:20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 이 말은 재판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왔고 장차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몸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의미를 함축(含蓄)하고 있다.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 바울은 재판을 받을 때 재판의 결과에 상관없이 복음에 대해서 담대히 변증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재판 결과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 살게 되든지 아니면 사형선고를 받아 죽게 되든지 간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재판 석상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언함으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소망한다.
21절 에모이 가르 토 젠 크리스토스 카이 토 아포다네인 케르도스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나 '그리스도가 삶의 구원'이라는 말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하나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를 받으며, 진실, 사랑, 희망, 복종, 전파 등이 삶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쳐나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삶의 형태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은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고(23절;고후 5:8) 상급 받는 축복 가운데 영원히 살 것이며(딤후 4:7,8)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존귀케 하는 것을 방해하던 모든 것에서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죽는 것'(아포다네인)은 부정 과거로 '죽음 후의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죽음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22절 에이 데 토 젠 엔 사르키 투토 모이 카르포스 에르구 카이 티 하이레소마이 우 그노리조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로마의 법정(法廷)에서 재판이 유리하게 끝나서 바울이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풀려났을 때의 삶에 대해서 '내 일의 열매'라고 진술한다.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구'는 바울 서신에서 복음 선포 사역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었다(2:30;롬 15:18;고후 10:11).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서 풀려난다고 한다면 삶 속에서 더욱더 그리스도가 증거 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가릴는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히레소마이'는 '고르다' 혹은 '택하다'라는 의미로서 중간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선호(選好)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울 자신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개인적인 마음도 있지만(23절),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고픈 생각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23절 쉬네코마이 가르 에크 톤 뒤오 텐 에피뒤미안 에콘 에이스 토 아나뤼사이 카이 쉰 크리스토 에이나이 폴로 말론 크레잇손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 '두 사이에 끼였으니'는 두 생각 즉 살아서 복음 선포 사역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과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심리적 상태를 나타낸다. 설사 갈등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육체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음을 시사한다(살전 4:13-16).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후에 연합하게 된다'는 이교 사상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함에 거함을 시사한다.
24절 토 데 에피메네인 엔 테 사르키 아낭카이오테론 디 휘마스
=====1:24
개역 성경에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개인적 소망과 반대되는 내용이 본절에 나옴을 시사한다.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바울은 개인적으로 육체(肉體)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원 하나, 살아있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훨씬 좋은 일이다. '유익'에 대해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목자의 심정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행하는 사역을 의미하는 듯하다.
25절 카이 투토 페포이도스 오이다 호티 메노 카이 쉼파라메노 파신 휘민 에이스 텐 휘몬 프로코펜 카이 카란 테스 피스테오스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 바울이 19-24절에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과 죽음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에 대해 진술한 반면에 본절에서는 '내가 살 것을 확실히 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울 자신이 천한 주변 요인을 생각하고 '풀려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편 바울이 살아서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거한다면,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믿음이 진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삶 가운데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26절 히나 토 카우케마 휘몬 페릿슈에 엔 크리스토 이에수 엔 에모이 디아 테스 에메스 파루시아스 팔린 프로스 휘마스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 '자랑'의 헬라어 '카우케마는 '기쁨'을 의미한다. 이러한 '카우케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있음으로 생겨난다. 왜냐하면 바울이 풀려나면,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救援)의 풍성함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7절 모논 악시오스 투 유앙겔리우 투 크리스투 폴리튜에스데 히나 에이테 엘돈 카이 이돈 휘마스 에이테 아폰 아쿠소 타 페리 휘몬 호티 스테케테 엔 헤니 프뉴마티 미아 프쉬케 쉬나들룬테스 테 피스테이 투 유앙겔리우
28절 카이 메 프뉘로메노이 엔 메데니 휘포 톤 안티케이메논 헤티스 아우토이스 멘 에스틴 엔데익시오스 아폴레이아스 휘민 데 소테리아스 카이 투토 아포 데우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바울은 이제 주제를 돌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생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리튜에스데'는 문자적으로 '시민답게 살아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로마의 시민답게 살아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 이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그 이유는 비록 빌립보 교인들이 로마의 시민인 것을 자랑하였지만(행 16:12,20,21),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빌 3:20). 그러므로 본절은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인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늘의 시민답게 사는 삶의 기준은 '복음'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일치하며 그 특권(特權)과 책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 본문은 '내가 가서 너희를 만나 보거나 아니면 가지 않고 여기서 너희에 대해서 듣거나'라는 의미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두 가지를 행하기를 권면한다.
(1)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일심으로'의 헬라어 '엔 헤니 프뉴마티'가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어서 '한 뜻으로'라는 표현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엔 헤니 프뉴마티'는 '인간의 영이나 마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바울은 공동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애써 수고할 것을 권면한다. '복음의 신앙'은 복음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있는 진리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빌립보 교인들은 '진리'를 보다 널리 전하고 지키기 위해서 수고해야 한다.
(2)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 '대적하는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들을 통해서 볼 때(행 17:5,13) 유대인들을 포함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변의 많은 핍박과 거짓 교사들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맞서서 영적 싸움을 전개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 빌립보 교인들이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대적자들의 핍박을 견디어 내는 이런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29절 호티 휘민 에카리스데 토 휘페르 크리스투 우 모논 토 에이스 아우톤 피스튜에인 알라 카이 토 휘페르 아우투 파스케인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과 고난을 받는 것을 내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하며(요 8:30),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처럼(히 2:10)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약 1:3,4;벧전 1:6,7).
30절 톤 아우톤 아고나 에콘테스 호이온 이데테 엔 에모이 카이 뉜 아쿠에테 엔 에모이
=====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 '싸움'은 대적자들로부터 오는 장애물과 위험 등,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게 될 재난의 개념이 내포된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영적 투쟁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겪었던 여러 가지 고난이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박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행 16:16-24;살전 2:2). 그때 귀신 들린 여종으로 인하여 빌립보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빌립보 교인들은 보았으며 그들 자신도 동일하게 바울과 같이 이교도들의 훼방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즉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과 같은 싸움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듣는 바'는 바울이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듣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빌 2:26).
[헬라어 성경 에베소서 복음 말씀] 성령의 인침을 받은 성도(엡 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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