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신약히브리어성경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 하나님 강림(행 2:1-13)

엘벧엘 2023. 6. 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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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했는데 성령 하나님이 오셨다. 마가의 다락방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곳에 성령이 임하여 방언이 터졌다.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들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 하나님 강림(행 2:1-13)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은 유월절부터 오십 일 째 되는 날이다. 정월(아빕월) 14일은 유월절이고 정월 14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이다. 레위기23:15-16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안식일은 유월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월절 다음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49)이 지난 그 이튿날이 오순절이다. 오순절을 맥추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34:22, 민28:26, 신16:9-10 참조). 오순절은 안식일 이튿날이니 이레 중 첫날 즉 주일날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후 첫 번 주일날(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고, 그 후 일곱 번째 주일인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날에 대하여 세 가지 학설이 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유월절 다음날은 안식일이고 안식일 다음날에 부활하셨다는 설(). 유월절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설().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유월절(유월절을 안식일로 봄)에는 무덤에 계시고 유월절 다음날 부활하셨다는 설()들이 있다.

설이 옳다고 믿는다. 요한 18:28에는 예수님이 재판받기 위하여 빌라도의 관정으로 들어갈 때에 유대인들이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재판받은 그날 못 박혔으므로 유월절 전 날 못 박히신 것이 분명하다. 또 그 안식일이 큰 날이라고 하였다(요 19:31 참조). 유월절이 큰 안식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월절 전 날 못 박혔다가 유월절(안식일)에는 무덤 속에 계시고 유월절 다음날 부활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첫 번 오순절이 되었는데 예수님의 제자 120명은 그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라는 뜻이다. 즉 거룩하고 성결한 곳으로부터 성령님이 오셨다는 뜻이다. 물론 성령님이 그전에도 세상에 계셨다. 시편 51: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다윗이 말하였다.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으며(눅 1:67 참조) 마리아에게도 성령이 임하였다고 하였다(눅 1:35 참조). 또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였다(눅 1:41 참조). 모든 성경이 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한 것도 성령으로 한 것이다(마 16:16 참조).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어떤 성령이신가?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은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한 14:16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였다. 요한 16:7에도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보혜사라는 뜻은 대언자혹은 돕기 위하여 부름 받은 자” “변호사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보혜사의 직분을 가지고 오신 성령이시다. 오순절 전에 역사하시던 성령과 보혜사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지만 직분이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전부터 형님이 계셨으나 이번에는 그 형님이 국회의원이라는 직분을 받은 것과 같다. 동일한 형님이지만 그 직분을 받은 다음에는 하는 일이 다르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의 성령이나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같은 한 성령이신데 직분이 다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강림하신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전파하고 이루어 놓으신 진리를 가지고 일하신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도리를 적용시키려고 보혜사 성령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하시는 일은 구약시대에 성령이 하시던 일과는 다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과 못 박히신 후에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제도와 의식에 가리어져서 희미하게 나타난 진리를 가지고 성령이 일하시었으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진리를 가지고 성령이 일하시기 때문에 더욱 큰 능력이 나타나고 더욱 큰 일을 하시게 되었다. 예수님이 완성하여 놓으신 이 진리를 대언하고 세워 나가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이 오신 것이다. 이 보혜사 성령은 한번 오신 다음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신다(14:16 참조).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신약시대에 계속해서 일하신다. 예수님의 탄생이 반복되지 않는 것과 같이 오순절에 강림하신 것도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믿게 하시고 감동하셔서 순종케 하는 성령도 오순절에 임하신 보혜사 성령이시다. 보혜사 성령이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16:13 참조). 요일 2:1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였다. 대언자라는 말이 보혜사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한번 오신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순종하여야 한다. 성령은 천지에 충만하시고 안 계신 곳이 없다.

예레미야 23:2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였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천지에 항상 충만하시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우주에 충만하신데 어떻게 왔다 갔다 하시겠는가! 아주 가셨다고 하면 그곳에는 성령이 없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안 계신 곳이 없다. 고로 성령도 안 계시는 곳이 없고 안 계시는 시간이 없다.

그러면 성령이 임했다” “가셨다” “거두어 가신다는 뜻은 무엇인가?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임했다는 뜻이고, 가셨다,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감동과 역사를 거두어 가셨다는 말이다. 즉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성령은 항상 계시지마는 감동과 역사가 떠나기도 하고 임하기도 하는 것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바람, , 혀라고 했는데 바람과 불과 혀가 성령이 아니고, 성령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의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표상(表象)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이 어떤 신이시며 어떠한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 주고 알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상들을 보여 준 것이다.

마태 3:16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으나 비둘기가 성령이 아니고 성령의 표상(表象)으로 나타난 것이다. 비둘기가 온유하고 정결하여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성령으로 완전한 구속 제물이 될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성령을 바람으로 상징한 것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같이 성령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일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이 구한다고 하여 성령이 그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할 때 자기 욕심대로 구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구해야 된다.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사물에 부딪친 결과를 보아서 강한지 약한지, 또 그 방향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사람에게 임하여 일해 놓으신 결과를 보아 그 성령이 어떠한 신이신지 알 수 있다. 급하고 강하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강하고, 하시는 일을 급속히 진행하신다는 뜻이다.

•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 성령의 역사가 불과 같이 뜨거운 것을 말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신다는 뜻이다(눅 24:32 참조).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선을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

진리를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

성경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

천국을 앙모하고 거기에서 살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성령이 주시기 때문이다.

요한 2:17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고 하였다.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므로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나아가는 것이다. 성령이 뜨겁게 역사할 때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단마음으로 나아간다. 토마스 목사가 성령의 뜨거운 역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와서 순교하였다. 성령은 육신을 뜨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뜨겁게 한다. 성령을 받으면 육신이 뜨거워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감정적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몸이 뜨거운 것처럼 잘못 느껴진 것이다. 불의 혀같이 혀는 맛을 아는 것과 말을 하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맛을 알게 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기도의 맛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전도하는 힘과 능력을 주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불학 무식하지만 성령으로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혀같이 갈라졌다는 것은 성령이 모든 것을 갈라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갈라놓는다. 또 마귀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 죄와 의, 하늘의 운동과 땅의 운동, 영의 것과 육의 것, 진리와 비진리, 영적 감동과 육적 감동,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갈라놓는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마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확실히 구별하게 되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지 않는다.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 위에 충만히 임하였다. 그 성령은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임하여 계신다. 만약 성령이 잠시라도 성도를 지켜 주지 않으면 마귀가 잡아 삼키고 멸망시킨다. 성령께서 항상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능력으로 보호해 주시므로 마귀가 성도를 잡아 삼키지 못한다. 성령이 항상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고전3:16 참조). 그렇지 않으면 버리운 자라고 하였다 (고후 13:5 참조). 성령은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려고 애를 쓰신다. 성령의 인도대로 순종하며 의지하는 자에게 성령은 더욱 충만케 역사하여 주신다.

방언으로 전도함(4-13)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그릇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성령이 사람에게 가득 차 있으면 충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성령을 충만히 받기도 하고 조금 받기도 하는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성령 충만이란 양적인 의미가 아니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온전히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도 다 없어져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으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일시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있다가도 마음속에 세상이 들어오고, 인간의 것이 들어오면 성령 충만이 못된다. 성령이 충만하려면 첫째, 제 생각 제 뜻, 자기 위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즉 자기가 완전히 죽어지고 성령의 인도만 따라가야 한다. 둘째, 성경 말씀을 순종하여야 한다.

요한 16:13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였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므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계속 인도하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을 다 순종하여야만 완전 충만이다. 성경 말씀을 조금만 어기거나 순종 못하면 성령 충만이 아니다. 성령이 늘 충만한 사람은 신구약 성경을 다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완전히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일생 동안 신구약 성경을 하나도 어김없이 전부 다 완전히 지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에 성령 충만이라고 기록된 것은 그 시간에 성경을 아는 범위만큼 성령의 인도를 전적으로 받았다는 뜻이다. 아는 진리를 다 순종하면 그 시간에는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 그 후에 성령이 다른 진리로 인도할 때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그의 인도와 주장을 받지 못하면 성령 충만이 못된다. 베드로가 오순절에는 성령이 충만하였으나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내려오므로 먹지 않는 척하고 외식하였다. 그때에는 베드로가 성령 충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계속적으로 받아나가야 한다(5:18 참조).

2:5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출애굽기 23:14-16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매년 삼차(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절기를 지키라고 했다. 이 말씀대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하여 천하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것이다.

2:6-12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쩐 일이냐 하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성령의 큰 권능이 임하므로 모든 사람의 심령이 깨어나고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다. 심령이 새로워지고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말하는 것도 새로운 말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심령이 새로워지면 그 사람이 하는 노래도 새 노래가 되고 말도 새 말이 나온다.

로마 12:2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방언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 말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한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 나라 말로 말하였으나 듣는 사람이 각기 저희 나라 말로 들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제자들이 자기 나라 말로 말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제자들이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하도록 능력을 입혀 주었다. 성령님은 모든 나라 말을 들을 수 있고 말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다 갈릴리 사람이었지마는 메데와 메소보다미아와 애굽과, 구레네와, 로마말로 전도하게 되었다. 실로 성령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이다.

둘째,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다. 고전 14: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할 수도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전 14:28 참조).

통역이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 안에서 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고 듣는 자도 야만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전 14:5). 유익이 안 된다(고전 14:6).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다(고전 14:7). 나팔이 분명치 못하므로 전쟁을 준비할 수가 없다(고전 14:8).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 된다(고전 14:9). 야만이 된다(고전 14:11).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전 14:14). 방언으로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함으로 감사할 수 없다(고전 14:16).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이 깨달은 성경을 다섯 마디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고전 14:19). 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있는 표적이다(고전 14:22). 무식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한다(고전 14:2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된다(고전 14:33).

방언을 통역하는 일에 대하여

방언을 통역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거짓 통역자가 많다. 그러므로 참 통역자인지 아닌지 시험을 해보아야 안다. 시험할 때에는 한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두 사람 이상이 통역을 하되 음성을 내지 말고 그 내용을 종이에 기록하도록 하고 그 기록들을 대조해 보아서 꼭 같지 않으면 참된 통역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을 금하지는 말고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하였다(고전 14:39).

셋째, 새 방언이 있다(16:17). 새 방언이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이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것은 처음 듣는 말이요 그 내용이 새로운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새 방언이라고 한다.

방언의 출처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있다. 둘째,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방언이 있다. 자기 마음에서 방언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자꾸 연습을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해야 된다고 하고, 자기도 방언을 하려고 애를 쓰면서 며칠만 노력을 하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참 방언이 아니다. 셋째,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도 있다. 마귀가 허영심에 날뛰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한다. 이러한 방언을 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 되고 마침내는 마귀의 일을 하게 되어 교회에 큰 타격과 손상을 입히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만 참 방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은 성경에 맞는다. 성경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이 아니다. 성령은 진리의 신이시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이다(16:13 참조).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새 술이 취하였다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을 조롱하여 한 말이다. 이렇게 조롱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데 너무 열광적이며 자기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술에 취한 것 같이 보이므로(신령한 역사를 알지 못하여서) 그렇게 비방하였다.

[사사기 1장 성경 좋은 말씀] 유다 지파와 아도니베섹(삿 1:1-20)

 

[사사기 1장 성경 좋은 말씀] 유다 지파와 아도니베섹(삿 1:1-20)

사사기 1장에서는 유다 지파가 아도니베섹을 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사사기는 혼탁한 시대를 살면서 가나안 땅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간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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