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지명 강해

[신약 구약성경 설교학] 복음적 설교를 하라

엘벧엘 2022. 9. 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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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설교를 하라

 

"복음을 설교하라" 말하기는 쉽다. 누구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천은 쉬운 게 아니다.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신자들이 재미있게 듣고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듣고 중생해서 그 내용대로 살게 만드는 엄청난 책임을 가진다. 그렇게만 한다면 삶의 모든 분야는 변화를 볼 것이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오히려 힘이 없게 보일지 모른다. 율법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훨씬 쉽고 강력할지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복음의 능력은 근본을 변화시킨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힘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죄 속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가 사해지고 그로 인한 모든 저주가 그쳤음과,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과 능력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 둘은 날마다 시간마다 확인되어야 한다. 이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삶에서부터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의식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분명히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3:10)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나님 자녀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작은 예수의 삶이 된다.

 

복음의 요소

 

복음의 요소를 한 번 더 살펴보자. 이미 여러 번 앞에서 말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을 말한다. 그 내용이 곧 복음이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된다. 그러면 그 내용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 설교자는 그 내용을 늘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속에서 사용하고 적용해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뒤에 성화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사랑도 희생도 당당한 삶도 아름다운 삶도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을 때 나온다.

 

칼빈은 구원을 세 요소로 나누었다. 택하심과 사죄, 그리고 회개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를 통해 성령으로 중생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선택되었음을 믿음으로 구원은 반석 위에 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택함 받았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힘 있게 부르짖는다. 유대인은 외형적인 선민의식 하나로 수천 년 동안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했다.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더욱 큰 힘을 공급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죄 속에 그냥 두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의 보혈로 구속하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죄를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로 인해 심판과 저주를 면할 수 없게 되었었는데! 선택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 신자라 하더라도 회개와 중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한 평생 살면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심판을 면하는 일이요 세상에서도 죄의식을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신자들도 자칫 세상일만 크게 보고 하나님께 관련된 이 구원의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그의 음성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입혀 실제로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죄를 사해주심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 삼으심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로 삼으심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기 위해 예수의 보혈로 죄를 속해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수치를 덮고 저주를 제거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다시 낳아주셔서 본성을 바꾸신다. 옛사람이 죽고 회개한 새사람이 다시 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삶의 능력을 조금씩 맛보며 자라가게 하신다. 복음은 이 일을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도록 돕고 계심을 알려준다. 신자의 삶은 자기 힘으로 살 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택함은 물론, 속죄함도 그렇다. 하나님이 다 행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 신자로서의 권능의 삶은 어떤가?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도우신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복된 소식의 내용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 소식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돌이킬 수밖에 없다. 너무도 비참한 자신에게 너무도 좋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듣지 않기 때문에 설교자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의무이다.

이 엄청난 구원사업의 핵심을 설교자가 맡은 것이다.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설파했다. 그리고 권징 곧 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목사의 직책은 이 일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온 교회는 목사의 이 일을 도와야 한다. 말씀 사역은 복음의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힘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그저 예배에서 설교 잘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 사역은 교회의 전체 방향, 신자의 훈련을 포함한다. 교회 생활 전체를 복음의 힘으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적인 말씀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복음적 논지 훈련

 

설교를 작성하다 보면 하나님의 복음보다는 다른 것들을 논지로 삼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도 복된 소식을 기준으로 삼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것이 회개, 개혁, 선교, 사회 정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신자라면 정치, 경제, 사회 등 삶의 제 분야가 다 하나님의 복음을 기준으로 삼아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논지를 보자.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자."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내자." "가난한 이웃을 돕자." "기도해서 능력을 받자." "삶의 목표를 바로 세우자." 얼마든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논지를 볼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말을 해도 예수가 해 주신 일을 힘입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여기 몇 개의 학생들의 논지를 살펴보자. "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예수 믿고 건강하게 살자."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이 정도라도 논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앞에 것들보다 복음에 많이 접근한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논지이다. 예수의 이름도 들어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내용이 삶에 적용되려면 그 사이에 들어갈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다. 그것이 없이 그냥 막연히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도와주시니 된다는 식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나 예수 대신 부처님이나 조상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 "부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자." "치료자이신 부처님을 믿고 건강하게 살자." "부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가자." "부처님은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절에서 이 설교를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기독교의 설교인가? 절에서 이 설교를 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양과 덕과 노력에 의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하는 데에는 부처나 예수나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복을 누리려면 절대적으로 복음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완성하신 일들을 선물로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안식, 치료, 능력 등은 반드시 예수가 이미 행하셨음을 알고 믿음으로 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복된 소식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그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 된다. 그것으로 앞의 논지를 손질해 보자.

 

"평안 자체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속에 계심을 아는 자는 항상 안식한다." "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병을 담당했으니 병의 억압에서 자유롭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그의 능력도 받은 자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도 누리자." 여기 그리스도가 하신 일과 우리의 할 일이 나타난다. 믿고 일어나는 것이다. 얼핏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계속 그렇게 듣게 된다면 점점 주의 힘으로 살고 자기 자랑은 줄어 들어갈 것이다. 앞의 학생들의 논지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여 그리스도가 해주신 일을 누리게 만들자는 것이다.

[새벽예배 10분 설교문] 영생의 집을 짓는 성도(고후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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