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말씀 강해

[아가서 2장 복음 성경말씀] 사랑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17)

엘벧엘 2023. 6. 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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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2장에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였다. 포도원에 꽃이 피었는데 여우가 다 망쳐 놓았다. 봄에 꽃이 필 때 여우들이 쥐를 잡아먹으려고 포도원을 돌아다니면서 헤쳐 놓았다. 그렇게 되면 꽃이 떨어져 가을에 포도를 수확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에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사랑의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 2:1-17)

 

성도는 가시밭 가운데 있음 (1-2)

2: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술람미 여자의 말 (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사론은 갈멜산 남쪽에 있는 들판으로 길이는 90리 폭은 30리나 된다고 한다. 여기 수선화는 장미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그 넓은 들판에 수선화 한 송이가 피었다가 진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꽃이 그저 넓은 들판에 나서 꽃이 피고 향기를 날리다가 때가 되면 스러져서 없어진다. 술람미 여자는 자신이 마치 이러한 사론의 수선화와 같다는 것이다.

성도는 광야와 같은 넓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사는 자가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해야 할 본분을 다 하다가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면 하나님 앞에 가는 자이다. 누가 알아주면 좋아하고 몰라주면 섭섭해하며, 다른 사람이 알아주면 잘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은 사론의 수선화가 아니다. 사람 앞에서는 피었다가 사람이 없으면 지는 꽃은 진짜 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사람이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하나님 앞에서 꽃을 피우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향기를 날리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은밀한 곳에 있는 백합화를 말한다. 이와 같이 숨어서 믿음을 지키고, 봉사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술람미 여자의 신앙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 술람미 여자의 신앙은 골짜기와 같은 은밀한 가운데서도 심령 속에 꽃을 피워, 그리스도의 향기로 골짜기에 가득하게 채우는 신앙이다. 요한계시록 2:17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했다. 성도는 자기가 꽃을 피웠는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리는 중에 있는지를 자기 자신은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잘 모른다. 골짜기 가운데 피어 있는 백합화는 그 골짜기의 밖에 있는 사람은 모르고, 그 골짜기에 들어가 직접 그 꽃을 보고 접촉해 본 사람만 안다.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왕의 말 (2)

여자들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내 사랑은 술람미 여자를 가리킨다.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는 험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 지키는 성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참 성도 술람미 여자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같이 보아주신다. 참으로 이 세상은 가시나무와 같이 사납게 성도를 핍박하고 환난과 고통을 준다. 미가 7:2-4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 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고했다. 성도가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환난이 많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는 바람이 불면 그 가시들이 꽃을 꾹꾹 찌르므로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백합화는 가시에 찔려서 찢길수록 더욱더 향기를 짙게 날리게 된다. 신령한 성도는 가시나무 같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꽃을 피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환난과 핍박이 올 때는 그 향기를 더욱더 많이 날리고 멀리까지 날린다. 술람미 여자와 같은 신령한 성도는 환난과 핍박을 받을수록 향기가 많이 날리고 순교당할 때에 그 향기가 더욱 많이 날리고 죽은 후에도 향기는 계속 날린다. 손 양원 목사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다. 그러므로 손목사님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많이 날렸다. 스데반도 순교당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많이 날렸다(7:59-60). 그는 술람미 여자와 같이 평소에 꽃을 피우고 있다가 환난과 죽임을 당할 때에 그 향기를 더욱 잘 날린 것이다. 그 향기가 그 시대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세대의 성도에게 아름다운 향기가 되었다.

참된 성도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심령 속에서 꽃이 피고, 숨은 봉사와 숨은 기도를 하면서 교회를 잘 받들어 나간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환난 이 닥치면 속의 향기가 밖으로 나오고, 멀리까지 날아간다. 우리는 술람미 여자의 신앙처럼 심령 속에 꽃이 피어 있는 신앙, 그리스도의 향기가 속에 가득 차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환난이 올 때에 속에 있던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어야겠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으로 즐거워함 (3-7)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술람미 여자의 말 (3-7)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수풀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벧전 1 :24 참조). 사과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같이 많은 사람들 위에 뛰어난다. 사과나무는 수풀과 달리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는 아름다운 향기를 내고 좋은 영양소가 된다. 또 무성한 잎은 여름에 그늘이 되어 시원하게 해 준다.

참으로 예수님은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와 같이 위대하고 존귀하신 분이시다. 공자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도 역시 수풀과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겸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사과나무와 같이 뛰어나고 비할 데 없이 존귀하다(7:28 참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어찌 인생들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술람미 여자가 사과나무 아래(예수님 아래) 앉아서 심히 기뻐하는 생활을 하고 그 사과나무 열매를 따먹는 생활을 하였다. 사과는 향기와 맛이 좋고, 영양이 많은 과실이다. 또 그 그늘 밑에서 시원하게 안식을 누린다. 이와 같이 신령한 세계에서 주님을 의뢰하고 사는 성도는 예수님 아래서 위안을 받고 예수님으로 부터 공급되는 꿀과 같이 단 생명의 열매를 먹고 만족한다.

2: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 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잔칫집 예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항상 잔치 집에서 사는 생활이다.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하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 가신 것은(2:1-11) 예수님의 구원운동이 잔치집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예수님이 하시는 생명 운동은 변화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구원운동은,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 즐거운 세상으로 만들고, 맛이 없는 세상을 맛이 있는 세상으로 변화시키고,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세상을 생명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는 어떤 뜻을 나타내는 표지(標識)이다.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연락(宴樂)하는 집은 사랑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 집 위에 사랑의 기를 세운 것이 다. 주님과 연회하며 연락하는 집은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곳이요, 사랑이 충만히 넘치는 곳이다.

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건포도는 포도를 말린 것이므로 단단한 식물에 속한다. 단단한 식물에 대한 신령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도리를 말한다. 성경 말씀을 초보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이고, 보다 깊게 가르치는 것은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1-2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라고 했다. 히브리서 5:13-14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 하는 자들이니라”라고 했다.

성도가 초보적인 진리만 먹으면 그 영이 힘을 얻을 수 없고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힘을 얻고 장성한다. 신구약 성경을 전부 젖으로 먹일 수도 있고 단단한 식물로 먹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3-14에 있는 넓은 길로 가는 자와 좁은 길로 가는 자에 대한 말씀을 해석할 때, 초보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좁은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젖으로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죄 가운데 거하고 방탕하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요, 성경 말씀대로 바로 믿어 보려고 죄와 더불어 싸우고 경건한 생활을 하고, 또 비진리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 양심을 써서 믿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는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것이다.

젖으로 먹는 사람은 쉽게 예수를 믿을 수 있으나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도는 해야 할 일이 많고 힘을 많이 써야 한다.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나가야 하므로 할 일이 많고 힘이 많이 든다. 그러나 그때에 능력을 얻고 자라나고 생명길을 걸어 나간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드 향유를 가져다가 부은 것도 젖으로 먹이는 해석은 나드유 그 물질만 쏟아부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단단한 식물로 먹이는 해석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자기 생명까지 예수께 전 폭을 쏟아부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한 식물을 먹고 그 말씀을 새김질하며 그 말씀에 도달하려고 힘을 써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심령이 새 힘을 얻고 점점 자라나게 된다.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사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심령이 시원함을 얻게 해 달라는 소원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 예수님의 생명이 심령 속에서 역사할 때에 심령이 만족을 누리고 새롭게 된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열매(사과 열매)는 우리의 심령을 살게 해 주고 향기로운 냄새로 그 심령에 만족을 준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병이 났다는 것은 마음이 상했다는 뜻이다.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다가 병이 났다.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몸의 기 운도 다 빠져나갔다. 시편 42:6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교제하려고 요단 땅과 헤르몬 산과 미살 산으로 헤매며 다닌 것이다. 이와 같이 신령한 성도는 예수님 만나기를 갈망하고 간절히 사모하여 들로 산으로 헤매며 주님을 찾아서 가까이하려고 한다.

2: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주님의 왼손은 위안의 손이요, “오른손은 능력과 보호의 손이다. 예수께서 성도를 위안의 손으로 평안히 안식하게 해 주시고 능력자 보호의 손으로 원수를 물리쳐 주시며 성도를 붙들어 일으켜 세워 주신다. 주님은 성도의 피난처요 안식처가 되신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그 심령에 참된 위로와 평안을 받게 되고 보호와 능력을 받게 된다.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자기를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신자들은 술람미 여자와 같이 영에 속한 성도를 흔들고 깨우기 잘한다. 신령한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침궁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즐거워하며 교통 하는 생활을 할 때 육신에 속한 신자들은 참 성도를 흔들며 깨운다.

육신에 속한 신자들은 참 성도에게 예수를 어찌 그렇게 믿느냐” “그렇게까지 믿지 않아도 된다”“꼭 그렇게 믿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곳에서 나와서 우리와 공동보조를 취하자”라고 하면서 흔들어 깨운다. 넓은 길로 나가는 신자들은 좁은 길로 걸어가는 신실한 성도들을 유혹하여 영의 길로 걸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노루와 들사슴은 연약하여 맹수들의 위협을 많이 받으며 잘 놀라는 짐승이다. 성도는 영적 생활에서 노루와 들사슴같이 깨어나기 잘한다. 골방에서 주님과 명적으로 교통 하다가 곧잘 세상으로 나온다. 노루와 들사슴은 또한 도망쳐서 산으로 올라가기를 잘한다. 이와 같이 신령한 성도는 노루와 들사슴처럼 영적 시온 산으로 계속 달음박질을 잘한다. 시온 산으로 계속 뛰어 올라가면 따라올 사람이 없고 아무리 큰 세력일지라도 그 성도를 이기지 못한다.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이것은 주님과 교통 하는 골방 생활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예수님도 성도가 그 자리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 술람미 여자가 깨우지 말라고 해도 예루살 렘 여자들은 듣지 않고 계속해서 깨울 것이다.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들이 깨울 줄 알면서도 이렇게 깨우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지라도 이렇게 부탁함으로 써 자기가 깨지 않겠다는 결심이 강해지고 예루살렘 여자들에게는 가책을 주어 견제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깨지 않겠다는 술람미 여자의 굳은 결심이 들어 있는 것이다.

고난의 주가 찾아오심 (8-9)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술람미 여자의 말 (8-9)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은 고난을 가리키는데 “(큰)산”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고, “작은 산은 오늘날 교회가 당하는 모든 환난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고난의 산을 넘어오셨다. 또 오늘날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의 작은 산에도 주님은 찾아오신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에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다(9:4).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7:55).

이처럼 주님은 성도가 고난당할 때 고난의 자리로 빨리 오셔서 같이 고난당하시고 도와주신다. 예수님은 성도가 믿음 지키다가 환난 당할 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빨리 그 고난의 산을 넘어와서 힘을 주시고 건져 주신다. 환난 없이 믿는 사람은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한다. 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멀리 떠나 계신다.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이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빨리 행동하심을 가리킨다. 우리 벽 뒤에 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하시고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고 계신다.

죄악의 벽이다. 이사야 59:1-3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려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고 했다. 우리의 죄악의 담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신다.

의문과 의식과 제도의 벽이다. 로마서 7: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라고 했다.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는 죄를 깨닫게 하고 오실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 생존을 하는 데는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방해가 된다(3:5-8; 2:20-2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문을 십자가에서 도말(塗抹)하셨다(2: 14).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하면서도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배척했다. 의식과 제도에 치우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방해가 되며,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는데 장벽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화(聖晝)나 성서의 내용을 담은 영화(映晝)나 환등(幻燈)이나 그림책이 어느 정도는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해서 빨리 인식시키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예수님과 신령한 교제를 하고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 데는 그것이 큰 장벽이 된다.

잘못 배우고 잘못 깨달은 것이 벽이다. 로마서 10:2-3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 성경을 잘못 배우고 잘못 깨달았다. 구약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령한 진리가 있는데 그 신령한 면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적인 지식만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잘못 배운자는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그대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이 벽이 된다. 차라리 그것을 몰랐더면 옳은 것을 가르쳐 줄 때 바로 배울 수 있다.

완고한 것, 자기가 하겠다는 것이 벽이다. 이것은 교만이다. 사무엘상 15: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라고 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장이 되어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시고 창으로 들여다보고, 창살 틈으로 엿보고 계신다.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이것은 예수님이 이따금씩 외부적인 감동으로 감동시켜 깨닫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5:4에는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징계를 해서라도 깨닫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벽을 헐어 버려야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죄를 회개하고, 의식주의를 버리고 잘못 배우고 잘못 깨달은 것을 과감히 고치고, 고집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감동을 순종하며 말씀을 따라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은밀한 중에 있는 성도를 부르심 (10-14)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술람미 여자의 말 (10-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술람미 여자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육신 중심과 세상 중심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같이 주님의 나라로 가자는 것이다. 성도는 이 말을 듣고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야 한다.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겨울도 지나고 겨울은 꽁꽁 얼어붙는 때로서, 영적으로 감동이 없는 때를 가리킨다. 비도 그쳤고 지루한 장마가 그쳐서 초목이 소성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지면에는 꽃이 피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양춘가절, 좋은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3:16). 즉 성령으로 역사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무화과나무는 유다 나라를 상징하는데(24:5), 구약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역사가 일어날 것을 가리킨다.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데(15),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점 창성할 것을 말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성령이 감동하고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인도하실 때에 즉시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6: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다. 봄이 늘 있는 것이 아니며 꽃이 늘 피어 있는 것도 아니다. 봄에 꽃이 핀 다음에는 열매가 열리고 가을이 되면 그 열매가 익고 또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

봄에 해야 될 일이 있고, 가을에 해야 될 일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 베풀 때에 은혜를 받고 예수께서 일어나서 가자고 할 때에 가서 주님과 함께 심고, 믿음의 열매를 거두어야 된다. 갈라디아서 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했다. 봄과 같이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반구의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봉사하고 충성해야 한다. 이때에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둘 뿐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실 때에 성령으로 의를 심으면 자라나서 열매를 거둘 날이 오고 또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을 받는다.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이것은 성도가 산과 바위 틈에 찾아가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도 산에 가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성도가 산이나 바위 틈이나 또한 은밀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고 그 소리를 듣기 원하신다. 그 목소리는 부드럽게 그 얼굴은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때때로 바위 틈, 낭떠러지 같은 은밀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해야 한다. 안일주의에 빠져서 침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능력을 얻지 못한다. 방 안에서 기도하는 것과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것이 다르고, 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다르다. 책상에서 얻을 것이 따로 있고, 바위 틈에서 얻을 것이 따로 있고, 은밀한 곳에서 얻을 것이 따로 있다. 교역자들도 이따금 바위 틈 낭떠러지, 험한 골짜기를 찾아가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한다. 다른 곳에서 얻지 못하는 은혜를 그곳에서 받는다.

여우를 잡으라 (15-16)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술람미 여자의 말 (15-16)

꽃이 핀 포도원에 여우가 들어와서 헐면 꽃이 떨어져 열매가 맺힐 수 없다. 포도원에 비료 주고, 김매주는 것도 중요하고, 전정(剪定)하는 것과 울타리 치는 것도 중요하나 여우를 잡지 못하면 포도 농사는 낭패하고 만다.

작은 여우는 성도 속의 욕심(물욕, 정욕, 사욕)이다. 혈기이다. 뒤돌아 보는 것이다. 이간시키는 것이다. 썩은 것 ()을 좋아하는 것이다. 참 교회를 허는 이단이나 악한 사상이다. 예를 들면 신신학 그릇된 신비주의, 해방신학 같은 것이다. 우상 숭배, 간음, 시험, 원망이다. 고린도전서 10 :1-11에 보면 이스라엘 광야 교회가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 시험하는 것, 원망하는 것 등 네 가지로 망했다. 교회 안에 우상 숭배나 원망하는 것이나 음란이 들어오면 꽃이 다 떨어진다. 그러므로 작은 여우를 경히 여기지 말고 잘 잡아야 한다.

우리에게 오는 여우는 처음에는 작은 여우이다. 누구나 잡으려면 넉넉히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경히 여기고 버려두면 얼마 후에는 큰 여우가 되어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여우였다(눅 22:1-6).

교회에서는 불평하는 자, 원망하는 자, 하나님의 일을 비방하는 자가 여우이다. 여우를 가만히 두면 포도원을 헐고 진리운동에 손해 주고 하나님의 교회에 시험거리가 되고, 모든 교인들이 은혜받는 데에 막대한 손해를 준다. 그러므로 그 여우를 용납하지 말고 잘 잡아야 교회가 잘 된다. 교회에서 불평하면 불평하지 못하게 하고 원망하면 원망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 여우를 잘 잡으면 개인 신앙도 잘 되고 교회도 잘 되어서 교인들의 심령이 자라나고 열매가 많이 맺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도에게 속했고 성도는 예수님에게 속했다. 예수님은 성도의 주시요, 성도의 생명이시요, 성도의 기업이시다. 또 성도는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기업이다.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서 당신의 소유로 삼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인 줄 알고 주님의 것으로 삼아 놓고,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 예수님을 우리의 기쁨, 우리의 소망, 우리의 생명으로 삼고 나가야 한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백합화는 성도의 심령 속에 꽃이 피어서 향기를 날리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가시밭의 백합화인데(2:2) 가시에 찔릴수록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성도를 예수님은 찾아가서 먹이시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를 살지게 만들고 더욱 소생시키고 잘 길러 나가신다.

주님의 재림을 고대함 (17)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술람미 여자의 말 (17)

나의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 날이 기울었다는 것은 남은 때가 얼마 없다는 것이고, 그림자가 간다는 것은 환난이 온다는 것이다. 개인에게도 종말(임종)이 닥치고 고난이 오고, 또 시대적으로도 말세에 대환난이 온다(24:3-22).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과 태도이다. 베데르는 이별의 뜻이 있다. 노루와 어린 사슴들이 낮에는 산에서 놀다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는 서로 이별하고 각각 자기 처소로 찾아 들어간다. 이와 같이 세상 끝날에도 예수님은 성도를 찾아오시고 성도는 예수님을 찾아간다. 지금은 세상의 악이 점점 성해지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이다. 성도는 재림하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오게 된 것이요 예수님께 갈 날이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잘해야 한다.

[사사기 1장 성경 좋은 말씀] 유다 지파와 아도니베섹(삿 1:1-20)

 

[사사기 1장 성경 좋은 말씀] 유다 지파와 아도니베섹(삿 1:1-20)

사사기 1장에서는 유다 지파가 아도니베섹을 정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사사기는 혼탁한 시대를 살면서 가나안 땅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간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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