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다. 거기에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러 온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말했다. 성도는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해야 한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세례 요한(요 3:22-30)
성 경: [요3:22] 메타 타우타 엘덴 호 이에수스 카이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에이스 텐 이우다이안 겐 카이 에케이 디에트리벤 메트 아우톤 카이 에밥티젠
이 후에...유대 땅으로 가서 - 많은 학자들은 22-30절을 현재의 위치에서 옮겨서 2:12 뒤에 놓아야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Barrett, Senders). 왜냐하면 '유대 땅으로'라고 하는 표현이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왔다고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해 냉담한 예루살렘 도시를 떠나 유대 지경 내의 변두리 마을로 물러가신 것을 나타 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곳이 요단 강 근처의 평야이거나 아니면 여리고 근접한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례를 주시더라 - 예수께서 세례(baptizing, NIV)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사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고 또 4:2로 미루어 보건대 실제로 세례를 베푼 자는 예수의 제자를 이었을 것이다. 이 세례를 기독교의 세례전(洗禮典)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그보다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친히 세례 요한의 증거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셨으며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과도기적 수단으로써 세례 요한식 세례를 긍정적으로 허용하셨으리라 이해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의 첫 메시지도 세례 요한의 주된 강조 사항인 '회개하라'는 내용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마 3:2;4:17). 한편 예수께서 몸소 세례를 베풀지 않고 제자들에게 대행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제자화 훈련(弟子化 訓練)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제자들은 훗날에 오순절(the day of Pentecost, NIV)의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난 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베풀어야 할 것이었다(행 2:1-4, 37-41).
성 경: [요3:23] 엔 데 카이 이오안네스 밥티존 엔 아이논 엥귀스 투 살레임 호티 휘다타 폴라 엔 에케이 카이 파레기논토 카이 에밥티존토
살렘 가까운 애논 - 이 두 지명이 현재의 어느 위치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살렘'(Salim)은 '평화'라고 하는 셈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지명이며, '애논'(Aenon)은 '샘'이라고 하는 아람어의 복수형으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 지명들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1) 베레아 지역 요단강 건너편으로 보는 견해.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8). (2)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남방 8마일 지점 즉 요단 계곡의 동쪽으로 보는 견해(4세기의 유세비우스). (3) 세겜으로부터 동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곳에 예부터 알려졌던 '살림'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8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 '아이눈'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애논'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 비록 현재 이곳은 물이 전혀 없지만 과거에는 많은 샘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Albright) (4) 또한 1세기 초기에는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heyne). 이 중에 세 번째 견해는 그곳이 유대 지역이 아니라 완전히 사마리아 지역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문과 다소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크리거(Krieger)는 저자의 확실치 않은 지리적 보고(報告)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즉 요한의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러한 평화를 제공하지는 못하는 반면 예수의 세례는 구원과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펑펑 솟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Bultmann)도 역시 살렘과 애논, 이 두 지명이 실재적인 것이지만 복음서 저자에 의해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된 것일 수 있다고 믿었다(the Anchor Bible).
성 경: [요3:24] 우포 가르 엔 베블레메노스 에이스 텐 퓔라켄 호 이오안네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옥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그 감옥에'(에이스 텐 퓔라켄)이다. 이는 저자와 당시의 직접적 독자들이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저자가 세례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 및 요한의 관심사가 예수의 사역에 보다 밀도 있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서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유일한 의의는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지 않는 내용 즉 세례 요한과 예수의 동시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요한이 투옥되고 갈릴리에서의 공적인 등장이 있기 이전에 초기에 유대 지방에서 전도 사역을 행하셨던 셈이다.
성 경: [요3:25] 에게네토 운 제테시스 에크 톤 마데톤 이오안누 메타 이우다이온 페리 카다리스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淨潔)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argument, NIV)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ceremonial washing, NIV)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딤전 6:4; 딤후 2:23; 딛 3:9)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성 경: [요3:26] 카이 엘돈 프로스 톤 이오안넨 카이 에이폰 아우토 랍비 호스 엔 메타 수 페란 투 이오르다누 호 쉬 메마르튀레카스 이데 후토스 밥티제이 카이 판테스 에르콘타이 프로스 아우톤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였고(1:19-28)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마 3:13).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缺禮)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 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막 1:45;3:7은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呼訴)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11:48).
성 경: [요3:27] 아페크리데 이오안네스 카이 에이펜 우 디나타이 안드로포스 람바네인 우덴 에안 메 에 데도메논 아우토 에크 투 우라누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본문에 있어서는 대화의 내 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하늘'은 하나님을 지시하는 완곡어로서 사용됨)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Bengel, Calvin)이나 (2) 예수 그리스도(Godet, Mey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된다(Lange, Lucke, Moulton).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성 경: [요3:28] 아우토이 휘메이스 모이 마르튀레이테 호티 에이폰 우크 에이미 에고 호 크리스토스 알르 호티 아페스탈메노스 에이미 엠프로스덴 에케이누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1:20에서 산헤드린(Sanhedrin)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闡明)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 번 증거 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yourselves)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행 18:24-26).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행 19:1-7).
성 경: [요3:29] 호 에콘 텐 뉨펜 뉨피오스 에스틴 호 데 필로스 투 뉨피우 호 헤스테코스 카이 아쿠온 아우투 카라 카이레이 디아 텐 포넨 투 뉨피우 아후테 운 헤 카라 헤 에메 페플레로타이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사 54:5;렘 3:20; 호 2:7;말 2:11)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계 19:7).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K. Barrett).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출 19:17)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2).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2:9)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 했기 때문이다(A. M. Hunter).
성 경: [요3:30] 에케이논 데이 아욱사네인 에메 데 엘라트투스다이
그는 흥하여야...나는 쇠하여야 - 이 말은 본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진술로서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단연 돋보이게 하는 구절이다. 위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내걸고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일 자체도 크고 힘든 일이거니와, 그의 주변에 모여든 열렬한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한계성(限界性)을 분명히 주지 시키고 그들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는 일에 이토록 적극성을 보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해야 한다'는 표현으로써 자신의 주장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확고히 천명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삶은 오직 그 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바쳐졌으며,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에 헤롯의 핍박을 받아 참수형(斬首刑)을 당함으로써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자'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막 1:14; 눅 3:18-20).
[역대하 4장 히브리어 성경 강해] 솔로몬이 놋으로 제단을 만듦(대하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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