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승천할 때에 겉옷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을 치니 물이 이리저리 갈라져서 엘리사가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도 임했습니다. 엘리야 승천을 엘리사의 생도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엘리야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50명이 엘리야를 사흘 동안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한 생도들은 결국 엘리야를 찾지 못하고 수치만 당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을 믿지 못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고 때가 되매 반드시 구름 타고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엘리사(왕하 2:12-18)
12절 베엘리샤 로에 비후 미차에크 아비 아비 레케브 이스라엘 우파라샤이브 비로 라아후 오드 바야하제크 비비가다이브 바이키라엠 리쉬나임 키라임
=====2:12
엘리사가 보고 - 10절과 비교해 볼 때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엘리야의 승천 사실을 엘리사가 목격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엘리사가 제시해 주었던 상황(3, 5절)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때 엘리사는 자신이 요청한 '갑절의 영감'이 응락된 것을 알았다.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 엘리사의 이 외침은 2장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3:14에서 요아스 왕의 입을 통하여 이 문구가 다시 말해진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 자체가 갖는 독특한 의미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지자를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요아스 왕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 구절을 문맥과 독립시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아버지여'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존경을 나타낸다. 즉 종들이 자기 주인에게(5:13), 또는 젊은 생도들이 나이든 선지자에게 이와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둘째, 이것은 선지자들의 지도자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외에도 혹자는 이것을 '엄마, 마마' 등과 같이 어린아이의 근심된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T. H. Gaster).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엘리사가 자신을 엘리야의 영적 아들로 인식하고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라'는 외침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Wycliffe). 왜냐하면 특히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뿐이심을 증명했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또 엘리사의 이러한 외침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사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 요아스 왕이 엘리사에 대하여 이 구절의 내용과 똑같은 말을 사용한 것(3:14)도 엘리사를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병거와 마병은 그 당시 최고로 강력한 병기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안전을 의존했던 것(Keil & Delitzsch, Vol. p.296-297)으로 싸울 때(욜 2:5;나 3:2), 물건을 나를 때(9:28), 여행할 때(행 8:29)등에 사용된 것이다.
엘리사 - 히브리어로 '엘리솨'로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리'와 '그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예솨'가 합쳐진 말이며 '나의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때는 이스라엘 왕국의 7대 왕 아합(B.C. 874-853)의 통치 말년이거나(왕상 19:1-7), 또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B.C.853-841)의 통치 초반으로 본다(3:1). 이때부터 제 12대 왕 요아스(B.C.798-782) 통치 초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예언 활동을 하였다(13:14-19).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둘로 찢고'라고 해야 바른 번역이 된다. 여기서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스승과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낸 행동이었다(Pulpit Commentary, Wycliffe).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던 엘리야가 사라진 것은 엘리사에게 큰 슬픔과 더불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그의 이러한 심적 상태가 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5:7;수 7:6). 이밖에도 재를 뒤집어쓰는 것(욥 2:8), 얼굴과 가슴을 치는 행위(눅 18:13), 정수리의 머리털을 면도해 버리는 것(렘 7:29)등은 모두 극도의 애통을 표시하는 관례적인 행동들이다.
13절 바야렘 에트 아데레트 엘리야후 아셰르 나필라 메알라이브 바야샤브 바야아모드 알 시파트 하야르덴
=====2:13
이제 엘리사는 다른 생도들, 즉 위의 모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게로 되돌아오기시작한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줍는 후계자 계승의 상징적 행위는 왕상 19:19에서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처음 부름을 받던 행위와 서로 연관된다. 한편 엘리야의 떨어진 겉옷은 엘리사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하나의 증표(Keil & Delitzsch)임과 동시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외적 증거이다(15절, Wycliffe)
14절 바이카흐 에트 아데레트 엘리야후 아셰르 나필라 메알라이브 바야케 에트 하마임 바요마르 아예 아도나이 엘로헤 엘리야후 아프 후 바야케 에트 하마임 바예하추 헨나 바헨나 바야아보르 엘리샤
=====2:14
물을 치며...물을 치매 - 여기서 '물을 치다'라는 표현이 두 번 거듭해서 언급된 것은 스승 엘리야가 행했던 능력을 상기시켜 줌(8절, The Bible Knowledhe Commentary, Pulpit Commentary)과 동시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출 14:21,22;수 3:17).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나이까 - 히브리어 원문은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더욱이 그는?'으로 표현되어 있어 마지막의 두 단어를 강조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던 기도였다(Wycliffe). 그러나 이것을 엘리야와 함께 그 하나님의 능력이 더불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근심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엘리사는 질문의 강조 형식을 빌어서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심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게 하셨고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확증시켜 주셨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3, p. 297).
15절 바이르에후 비네 하니비임 아셰르 비리호 미네게드 바요미루 나하 루아흐 엘리야후 알 엘리샤 바야보우 리키라토 바이쉬타하부 로 아리차
=====2:15
맞은 편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의 기적을 목격하고서 그가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그의 권능을 이어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요 17:18;행 14:23). 그래서 그들은 엘리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뜻에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였다. 한편, 엘리야가 요단 강을 건넌 후 얼마 되지 않아 승천하였고 이것을 목격한 이후 엘리사도 겉옷을 취하여 곧바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요단 서편 언덕에서는 여리고의 선지 생도들이 엘리야의 일을 궁금하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모두 확신케 되며 이제부터는 새로운 선지자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한편, 본절에서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는 말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선지 생도들의 고백이다(Wycliffe).
16절 바요미루 엘라이브 힌네 나 예쉬 에트 아바데카 하미쉼 아나쉼 비네 하일 옐리쿠 나 비바키슈 에트 아도네카 펜 니사오 루아흐 아도나이 바야쉴리케후 비아하드 헤하림 오 비아하트 하기야오트 바요메르 로 티쉴라후
=====2:16
용사 오십 인 - 문자적으로 '용사'라는 단어는 '힘의 아들'이란 뜻으로(Pulpit Commentary) 주로 군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여기서 '용사'는 사흘 밤낮 엘리야를 찾아 험하고 가파른 산중을 헤매어 다닐 수 있는 건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들이 수색한 결과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하므로(17절) 엘리사의 말에 더욱더 큰 신임을 갖게 되었다.
청컨대...던지셨을까 하나이다 - 여리고에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혼만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야의 육체가 어느 높이만큼 올라간 후에 필연적으로 지상 어디엔 가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동안 선지자로서의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육체를 찾으려 하였다.
여호와의 신 - 여기서 회리바람과 여호와의 신에 대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즉 11절에서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것은 여호와의 신이 그를 인도해 가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회리바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능력의 도구이기 때문인 것이다(H. W. Robinson). 한편 왕상 18:12에도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 선지자를 인도하심으로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즉 선지자의 생도들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엘리야의 영을 인도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영'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엘리야의 영육 전부가 아니라 육신과 분리된 영이라고 선지 생도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사상은 유대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Ascension of Isaiah 6:14).
보내지 말라 - 히브리 원문은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Pulpit Commentary)라는 의미로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엘리사의 확신에 찬 신앙을 나타낸다.
17절 바이피치루 보 아드 보쉬 바요메르 쉴라후 바이쉴리후 하미쉼 이쉬 바이바키슈 쉴로샤 야밈 비로 미차이후
=====2:17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强請)하매 - '부끄러워하도록'은 '...까지'를 뜻하는 '아드'와 '실망하다'를 의미하는 '부쉬'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이 그가 부끄러워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Gesenius, Keil & Delitzsch). 그러나 70인 역(LXX)은 이것을 '그가 자기의 거절을 더 이상 고집하기 어려울 때까지'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8:11에도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선지 생도들의 강청에 못 이겨 엘리사가 "보내라"라고 말했을 때는 그는 단지 그들의 불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엘리사의 충고 대로였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본절은 단지 엘리사가 '만일 너희가 그것을 고집한다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민족을 위해서 보내라'라는 의미로 허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18절 바야쉬부 엘라이브 비후 요셰브 비리호 바요메르 알레헴 할로 아마르티 알레켐 알 텔레쿠
=====2:18
본절은 다른 선지자의 생도들보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난 엘리사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영적 능력과 더불어(14,15절) 이 같은 통찰력을 구비함으로써 엘리사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영적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본절에서는 엘리야의 사라짐에 대한 확실한 역사적 사실성과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공식화되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말씀 열왕기상] 아도니야 처형과 아비아달 파면(왕상 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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