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 3장에서는 요나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는 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했는데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회개했다. 하나님은 심판하려고 하시다가도 회개하면 심판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회개가 일시적인 회개라는 것이 문제다. 나훔서에는 니느웨가 멸망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회개를 해야 한다.
니느웨의 회개(욘 3:5-10)
Ⅰ. 여기에는 임박한 멸망을 경고함으로써 니느웨를 회개시키고 개혁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나오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토록 큰 사례를 보지 못하였다. 심판 때에 니느웨가 일어나 복음 시대 사람들을 쳐서 정죄할 것이니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큰 이가 여기 있다" (마 12:41). 아니,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의 불회개와 고집을 정죄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셨고 그들은 백성 중에서 말과 일에 능한 자로(눅 24:19)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니느웨에는 단 한 사람만 보내셨고 게다가 그는 전혀 낯 모르는 자였다. 우리는 그의 몰골 또한 초라했으리라고 상상할 때는 허약했다(고후 10: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했으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요나는 단 한 가지의 설교를 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말을 확증시킬 수 있는 표적이나 기적을 보여 주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느웨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이스라엘인들은 여전히 완고하였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씀을 골라서 선포했고 그에 따른 표적으로 확증을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완악하였다. 요나는 단지 진노와 파멸을 경고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거나 회개의 방법을 교시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희망이 있다고 격려하는 장면은 더 더구나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뉘우쳤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사랑의 줄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끌고 만약 그들이 회개하며 개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큰 일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회개를 고집하였다. 자, 여기서 니느웨가 회개한 방법이 무엇이었으며 그 단계와 특수한 사례들을 관찰하자.
1.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말씀을 신용했다. 그들은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많이 두고 있었지만 만유의 주권자로 단 한 분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하나님께만 책임적 존재이며 그들에게 죄를 지었으며 그의 공의에 거슬리게 행동했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임박한 파멸의 경고도 그 하나님한테서 나왔고 따라서 파멸 그 자체도 적절한 시기에 회개하여 방지하지 않으면 정해진 시간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이 자비로운 신이셔서 만일 경고된 죄로부터 자기들이 돌이킨다면 위협된 진노를 돌이킬 희망도 다소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 그를 배역한 후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그는 화해할 수 있으신 분이시며 정당한 경로만 취한다면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매우 작고 약하고 도저히 될 것 같지도 않은 수단으로써 얼마나 큰 믿음을 이룩하실 수 있으신지 관찰하자. 그는 몇 마디 위협적인 말로써 니느웨인들을 믿음에 순종하도록 만드실 수 있으시다. 어떤 이들은 니느웨인들이 사공들이나 타인들이나 또는 요나 자신에게서 그가 바다에 던짐을 당했다가 기적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을 들었으며 이야기가 그의 선교를 공고히 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로 하나님을 보다 쉽사리 믿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견해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요나의 재생에 의해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복음을 확증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의 사유하심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만방에 선포하는 자들의 크나 큰 성공에 기여하고도 남음이 있다.
2. 그들은 이 말을 니느웨 왕에게 전했다. 어떤 이들은 이때의 왕이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였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앗수르 왕 불(pul)이었다고 생각한다. 요나는 왕의 위엄을 존중하여 맨 먼저 왕궁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다. 왕관을 쓴 머리도 범죄 한 머리일 때는 하나님 앞에서 일반 평민의 머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요나는 궁정으로 보냄을 받지 않고 니느웨거리로 가서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는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 그 정보는 요나를 공안의 문란자로 고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치안 교란자로 몰아 입을 다물게 하려거나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요나가 만일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하고 외쳤더라면 아마 그런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요나에 대한 말을 임금에게 전한 자들은 공중의 안녕과 복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던 자들로서 요나의 말을 듣고 떨며 니느웨 왕에게 범죄인에 대한 보고를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다. 나라의 안녕과 평화에 관한 보고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와 섭리의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에 대해 알려 주는 신하를 거느린 왕들은 행복하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그런 보고에 유념하는 지배자를 두고 있는 백성들도 행복하다.
3. 왕은 겸비하는 모범을 보였다(6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소문을 듣자 모압왕 예글론처럼 보좌에서 일어났다. 에글론은 에훗이 하나님의 전언을 갖고 왔다고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삿 3:20). 니느웨 왕은 자기 보좌에서 일어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반적 존경심에서가 아니라 진노의 말씀에 대한 개별적 두려움과 죄에 대한 근심과 수치심에서였다. 그와 그의 백성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좌에서 일어나자 제왕의 위의를 표시하는 왕복을 벗어버렸다. 이것은 하나의 자복 행위였다. 그는 압제와 학대를 견제하고 정의를 유지시키는 데 권력을 사용했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 앞에 자기의 왕좌와 왕복을 몰수당했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왕으로서의 신임과 명예를 감당할 수 없는 자로 자처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빼앗아 가셔도 할 말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는 비록 왕이지만 참회자의 의복을 능멸치 않고 스스로 입기를 주저치 않았다. 이는 그가 굵은 베를 입고 제에 앉았던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스스로 겸비하며 신의 복수를 두려워했다는 표시였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도 스스로 낮추는 것이 어울린다.
4. 백성은 왕의 수범에 따랐다. 아니 백성이 왕의 겸비와 회개를 유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니느웨 백성이 맨 먼저 큰 자에서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를 입기 시작했던 까닭이다(5절). 그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즉 성이 무너지면 잃을 것, 극히 적은 자들도 자기들이 이 경고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편안히 누워 으리으리하게 사는 데 익숙한 가장 큰 자들도 겸비의 표지를 몸에 걸치는 것이 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굵은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좋은 세마포만 입던 자들에게는 그러했다. 만일 그들이 깊은 죄의식과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았던들 이렇게 행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죄의식과 위기의식을 표시하려고 했을 것이다. 파멸을 당하지 않으려는 자는 스스로를 낮춰야 하며 자기 영혼을 멸하지 않으려는 자는 제 영혼을 괴롭혀야 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위협할 때 우리는 그의 능하신 손길 아래서 자신을 낮추는 일에 관심하여야 한다. 비록 육체적 행사만으로는 아무 이득이 없으며 사람이 굵은 베를 띠고 재를 뿌리더라도 그것이 전부면 장난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마음이기에, 사 58:5) 그래도 하나님께서 섭리로 애곡을 촉구하시고 굵은 베를 띠라고 부르시는 엄숙한 날에는 내적인 슬픔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우리 몸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
5. 범 국민적 금식이 선포되었고 그 큰 성읍 전체를 통해 시행되었다(7-9절). 이것은 왕이 그의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명령한 것이다. 전 입법권이 금식일을 지정하는 데 일치하였고 온 백성의 무리가 금식의 준수에 합치하였으며 이 두 가지 면에서 그것은 국가적 행위가 되었다. 국가적 파멸을 방지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선포의 내용과 대하게 되는데 그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선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1] 금식의 엄수가 요구되고 있다. 금식을 위해 지정된 이 날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 것이니라." 그들은 아무리 소량이라도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들은 물을 마셔도 안 되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래 금식하다가는 건강을 손상시키게 된다거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 번쯤 이 일을 시도해 봐야 한다. 그런 불편을 겪고 얼마간 고통을 느끼면 무슨 상관이냐? 몰락할 도성을 건지기 위해 그런 고행이 필요하다면 그런 참회의 행위에서 빠지기보다 오히려 그것에 승복하는 것이 낫다. 그들은 금식하여 굵은 베를 입음으로써 신체적으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의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짐승조차 사람과 함께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의 죄의 도구로서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만들어진 때문이다. 게다가 짐승들은 음식을 주지 않으면 불만을 표시하거나 말없이 헐떡임으로써 자기 주인들에게서 슬픔과 겸비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울 안에 갇힌 가축 떼에게 보통 때처럼 꼴과 물을 먹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어떤 음식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먹는 류의 것은 잊어버려야 했다. 먹은 것은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열중할 때는 짐승들에게도 자기와 함께 찬미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듯이 니느웨 사람들이 죄에 대한 슬픔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때는 참회의 표현에 하등 동물도 같이 참여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짐승들을 값비싸고 훌륭한 장식물로 감싸 놓곤 해댔다. 그런 호화로운 장신구는 주인과 짐승의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는 굵은 베옷으로 단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큰 자들도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금식과 애곡 외에 기도를 해야 하며 하나님께 탄원해야 했다. 왜냐하면 금식의 목적은 기도의 의무에 있어서 신체로 하여금 영혼의 봉사에 적합하도록 있는 데 있다. 주된 것은 기도이며 다른 것은 예비적인 것이나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힘써(강하게:원의) 부르짖게 하라. 짐승까지도 제 역량대로 부르짖게 하라. 까마귀 새끼와 어린 사자의 부르짖음처럼(욥 38:41; 시 104:21) 먹을 것이 없어 부르짖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으로 은혜로 해석되게 하라. 특히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라. 그들을 쳐서 부르짖는 죄의 용서를 위해 그리고 요나가 그들을 쳐서 부르짖은 심판의 방지를 위해 그들은 힘써 부르짖어야 한다. 파멸과 그들과의 사이가 한 걸음밖에 되지 않던 그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요, 여호와를 찾아야 할 때였다. 노력은 기도 시에 고정된 생각과 견실한 믿음과 경건하고 돈독한 열성으로 힘써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힘써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 우리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구의 지위를 버리고 우리에게서 떠나실 뿐만 아니라 원수로서 우리를 치러 오실 때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3] 그들은 금식과 기도에다 생활의 혁신과 개선을 추가시켜야 했다.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이라." 그 악한 길은 각자가 좋아서 택한 길이며, 각자가 탐닉한 악한 길이며, 마음의 악한길이고 또 각자의 행위의 악한 길이다. 그들은 또 그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야 했다. 그들은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어야 했고 자기들이 행한 학대를 보상해야 했으며, 자기들의 손아귀 안에 있는 자들을 더 이상 압제하지 말아야 했고, 자기들과 거래하는 자들을 속여서는 안 되었다. 권세자는 법정에서 그 손의 강포로부터 돌이키고 불의한 명령을 발하지 않으며, 그릇된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했고, 상인은 장사에서 그 손의 강포에서 돌이켜 부정한 도량 형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고객의 무지나 궁핍을 악용하여 기만하지 말아야 했다. 우리가 죄에 대해 금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죄에서 떠나 금식해야 하며 우리의 기도가 성공하려면 우리 마음과 더 이상 죄악을 품지 말아야 한다(사 66:18)는 데 주목하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열납 하신 금식이다(사 58:6; 슥 7:5, 9). 금식날의 일은 그날에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날에는 그 일 중 가장, 어렵고 필요한 부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죄에서 떠나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며 개처럼 자기가 토한 것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2) 이 금식은 어떤 유인에 기초하여 선포되며 또 경건히 준수되는가?(9절)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뉘우치실 줄 누가 알랴?"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자기 길을 바꾸시고 그들에게 대한 판결을 취소하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런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자인하면서도 그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탄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파멸이 방지되고 멸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평한 심판에 대해 반대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심판을 무효라고 하면서 보다 상급 법원에 항고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기만 바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공의에 이기고 기뻐하실 것만 바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진노하셔 마땅하며 자기들의 죄가 극악하기 때문에 그의 진노는 맹렬하여서 그가 심판하기 시작하시면 치료책도 없고 자기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멸망하며 모두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의 진노의 능력을 누가 알랴? 그러므로 그들이 기도로써 방지하려는 것은 성의 무너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기 돌이키기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서 기도할 때는 모든 선한 것도 간구하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기도할 때는 모든 악한 것에 대해서도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들이 이에 대해 품은 소망의 정도는 어떤가?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실지 누가 알랴? 요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그런 말을 해 줄 다른 선지자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달리 그들은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가 있어서 회개하면 용서를 얻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에 대해 일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로우시며 죄인의 참회와 회심을 기뻐하신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이런 천래의 인식으로부터 하나님이 자기들을 살려 주실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감히 억측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자비에 대한 소망은 회개와 개혁에 대한 최대의 격려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 자신의 죄의식과 무가치성 그리고 하나님의 참으심을 오래도록 남용했다는 인식에서 야기되는 큰 두려움에 어렴풋이나마 약간의 소망만 번쩍이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진지한 회개와 개혁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더라도 은혜의 발등상 앞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담대히 자유로운 은혜의 발등상 앞에 몸을 내던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여기실지 누가 알랴?
Ⅱ. 여기에는 회개하는 니느웨인들을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가 나온다(10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한 것을 감찰하셨다. 그들은 선한 말로 참회를 고백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말을 들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선한 행위로써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고 하나님께서는 또 이것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셨고 그것은 그가 찾고 요구하시던 것이었다. 하나님이 만일 그런 것을 보시지 못했다면 그들의 금식과 굵은 베옷도 그가 보시기에 보잘것없을 터였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죄악에 대한 거족적 각성과 다시는 죄로 돌아가 않겠다는 거국적 결의가 번뜩이는 것을 보셨다. 그는 얼마간이긴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그 성읍의 면목이 일신되었다는 것을 감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개과천선하는 하나하나의 사례를 다 주목하신다는 데 유의하자. 비록 세상 사람은 회개하는 죄인의 모습을 낱낱이 관찰하거나 인식하진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사례도 빠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는 누가 자기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며 누가 그러지 않는지를 보신다. 그는 진정한 회심으로 자기를 맞아들이는 자는 은총으로 그들을 맞으신다. 그들이 자기들에 의해 자행된 죄의 폐해를 뉘우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언하신 심판의 재앙을 돌이키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살려 주셨으며,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렸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인 것이다. 니느웨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심령, 곧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하지 않으신다. 그가 너그럽게 보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전도서 3장 강해 설교말씀] 인간사의 가변성(전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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