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말씀 강해

[로마서 10장 주일설교말씀] 복음의 책임을 다 하려면(롬 10:1-21)

엘벧엘 2022. 9. 1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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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책임을 다 하려면(롬 10:1-2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

 

본문 1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9장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불신앙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 두사 저들을 구원하시고 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남은 자의 구원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나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하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하시면 됐지 우리의 전도가 필요 없지 않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선교에 있어서 인간 편의 책임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 드리는 인간 편에서의 결단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인간 편의 응답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 성경은 이 양자를 꼭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사실은 기독교 교회 역사에 있어서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편만을 강조하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책임 편만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사상을 칼빈주의라고 불렀고, 인간편의 응답과 책임을 더 강조하는 신학 사상을 가리켜서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신학생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다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두 그룹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이쪽도 저쪽도 속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느 때까지 중간에서 머뭇거리겠는가고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하자 그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칼빈주의 쪽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왔냐고 묻자,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칼빈주의가 더 성서적인 것 같아서 결정하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칼빈주의자 쪽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서 온 사람은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기에 온 것도 하나님이 결정해서 왔다고 말해야지 당신이 결정해서 왔다고 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라고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알미니안 쪽으로 갔습니다. 그들 역시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이 사람은 대답하기를, “저 쪽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이곳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알미니안주의 쪽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스스로 자율적인 의사로 결정한 사람들만 오는 곳이지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온 사람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영원한 우리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신학적인 역설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계획하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앙의 결단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인간 편의 책임 있는 선교는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양자를 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 바울 사도가 10장에서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복음의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특권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 있는 이유는 복음의 진정한 지식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2). 바울 사도는 여기서 열심이라는 단어와 지식이라는 단어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습니까? 그러나 그 열심이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은 필요한 것이나 열심을 참된 신앙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보다 복음에 대한 열심을 더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찾아가고 싫어해도 계속해서 열심히 찾아가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열심 때문에 그들을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히틀러에게 광적인 충성을 바쳤던 사람들의 충성은 가히 종교적 충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을 보면서 그들이 진리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습니까? 오늘 한국사회의 일각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주사파의 문제를 보십시오. 사회가 그렇게 싫어해도 거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아직도 사회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열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3).

 

자기가 확신하는 자기의 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망각된 채 내가 내 열심으로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추구했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Torah)하라하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이미 하지 못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해 버린 율법을 파괴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율법을 파괴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의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의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라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의로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비밀이 바로 구원의 감격이 아닐까요? 구원은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본문을 읽어가다 보면 6-7절에서 난해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 이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까요? 아니면 저 깊은 땅 속으로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 하나님의 말씀은 메시아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로만 구원이 가능한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가까이 와서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의 열심으로만 구원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구원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 앞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을 산 기도 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실대로 알고 또 받아들이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분명한 복음의 진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수락하는 것이지만 미신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받아들이고 그 허상의 진리를 향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또한 불신은 분명한 진리를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복음의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 열심은 있으나 정확한 지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그들과 똑같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열심이 특심한 종교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던 이유도 그의 종교적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으며 그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서 다메섹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믿고 있었던 그 하나님이 자기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구원의 참된 지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참된 구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절대로 복음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구원 체험의 가장 외적인 표현은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요, 나의 주님이십니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도 입술로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환경에 익숙해지면 종교적 모방을 능히 할 수가 있습니다. 남들처럼 기도하는 척하고, 남들처럼 신앙고백도 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줄줄이 외우기도 합니다. 정말 내 입술의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부터 그 사실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

 

본래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기록되었는데 소위 희랍 사람들에게 마음에 관한 정의를 물으면 간단히 인간의 지성과 의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첫째 단원에서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대부분 두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작용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구원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지식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사실만 안다고 구원이 아니라 그 사실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시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귀신들이 믿는다는 표현은 지식적으로 안다라는 의미에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유일한 하나님이신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귀신처럼 지식적으로 사실을 알기만 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귀신의 믿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드리고 정말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알지만 그 부활이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삶을 드리지 않습니다.

 

구원은 지식 이상의 것입니다. 어느 날 이 구원의 놀라운 지식이 전달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복음의 사건인 것을 깨닫고 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만을 구원의 주님으로 신뢰한 이 놀라운 사건이 여러분에게 일어났었습니까? 제가 탄 배가 난파선이라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조선이 등장했습니다. 이 난파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 구조선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난파선에서 구조선으로 옮겨 타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난파선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도 그 목숨을 난파선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의지하던 난파선에서 내 목숨을 구조선에다 맡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시라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사건이 여러분의 생애에서 정말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까? 입술로 시인하는 그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 마음으로부터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술로 뜨거운 감격 속에서 그 사실을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 구속자가 되시니라는 찬송을 부를 때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이 사람들은 신앙의 기초를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은 아직 머리에 머물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직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이 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복음을 발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사건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경험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사실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을까요? 이제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이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신체의 구조를 통해서 복음의 책임을 설명하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먼저 머리로 구원의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어야 하고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발로 걸어가셔야 합니다. 복음 없이 살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우리의 발걸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 책임을 감당하고 계신지요?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을 강조했고 본문의 10장에 들어와서는 이 구원이 실현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런 구원의 작정과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기 위하여 복음을 들고나가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9장과 10장이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 초대교회 이후 17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관한 한 전 지구상의 교회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선교를 하기는 했었습니다만 전 교회적으로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일이 1세기부터 시작해서 1700년대까지 깜깜한 암흑시대였습니다. 그러던 1787년의 어느 날, 영국의 한 젊은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그는 성경이 너무 좋아서 성경을 계속 읽다 보니 성경의 매 페이지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우 단순한 마음을 갖고 있던 이 청년은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저를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계지도를 만들어 복음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지역을 찾아 표시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어느 지역으로 보내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고 있던 이 젊은이는 너무나 마음이 뜨거워져서 한 번은 목사님들의 모임에 찾아가서 목사님들, 제가 성경을 읽어보니까 선교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리랜드 박사는 젊은이, 앉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자네가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네. 그런 광신자 같은 소리를 말게.”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젊은이는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의 그의 전기에 보면 그는 그 당시 자리에 앉으면서 박사님 맞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나 제가 없이도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에는 하나님은 당신이나 저를 통해서 그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를 동조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 그는 인도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유명한 윌리엄 켈리입니다.

 

가지 않는다면 누가복음을 전할까요?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을까요?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이것은 비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날마다의 우리의 삶의 장에서 만나는 복음 없이 주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복음선교의 책임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본문은 15절로 끝납니다. 그러나 16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보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선포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복음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불순종한다고 거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이것이 바울을 지배하고 있던 유일한 한 가지의 관심이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노라

 

제가 미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목사님 가운데 한분으로부터 어느 날 직접적으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분은 하루라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밤에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하나님,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발걸음이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식당에 가셨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의 서비스가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접시를 팽개치듯이 던져 놓고 가버리고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침부터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팁을 안 놓고 식당을 나오려고 하는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서 혹시 그 자매가 불쌍한 자매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팁을 풍성하게 놓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팁을 10불이나 놓고 나왔답니다. 미국에서 아침식사에 10불 팁을 놓는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막 나오는데 그 자매가 선생님께서 돈을 잃어버리고 가셨습니다”라고 하며 따라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팁이라고 했더니 웬 팁을 이렇게 많이 주시냐고 물었답니다. 이분이 대답하기를 자매여, 오늘 아침 자매의 마음이 왠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자매의 마음을 좀 유쾌하게 만들고 싶어서 팁을 넉넉하게 놓은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이 자매는 선 채로 막 울면서, “선생님, 미안합니다. 제가 선생님에게 좋은 태도를 갖지 못했지요? 사실 저는 어젯밤에 이혼을 당했습니다.”라고 고백하더랍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자매와 함께 그 자리에 다시 앉아 복음을 전했고 그날 아침 그 자매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만일 그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앞에 민감하지 않았더라면 그 귀한 영혼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워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복음의 지식을 머리로 받으셨습니까? 마음으로 믿으시고 입술로 고백하시나요? 이제는 발로 가서 전할 시간입니다. 당신이나 제가 안 한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또한 지금 안 한다면 언제 할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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