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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성경 좋은 말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본 이신칭의(갈 3:6-18)

엘벧엘 2023. 1. 2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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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본 이신칭의(갈 3:6-18)

 

갈라디아인들에게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또 이로써 그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을 깊이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쓴 사도는 본문이지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가 책망한 교훈을 광범위하게 증거 한다. 그것은 주로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인(義認)에 대한 교훈이었다. 이 사실을 그는 몇 가지 방법으로 증명한다.

Ⅰ. 아브라함의 의인(義認)을 예로 들어 믿음에 의한 의인을 증명한다. 사도는 이를 증거 하는 데 로마서 4장의 것과 같은 논증법을 사용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라고 말한다(6절). 즉 다시 말해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그리고 그의 이 믿음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되었고 또 용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상징된 것이었다. 사도는 이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육체를 따라서가 아니요,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것"을 우리에게 말씀한다(7절). 따라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같은 방법에 의하여 그들도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들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창 12:3).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고 그 내용이 본문에도 성경 또한 하나님이 믿음의 수단을 통하여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자만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사도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불문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하여 따라서 그가 가진 것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 믿음의 아버지인 그와 함께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얻는 것도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법정에 서서 그 재판을 받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추방당하고 정죄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죄함을 받지 않고 의롭게 되는 방책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의인(義認)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재판 법정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불리한 선고를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신 27:26). 율법에 의하면 인간들은 누구나 생활이 완전해야 하며 인격적이어야 하고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율법의 용어는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든가 또는 12절의 경우처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에 살리라"는 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율법은 저주를 선언한다. 우리의 복종이 율법책에 쓰인 모든 것대로 보편적이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또한 영속적으로 되지 아니하는 한(만일 어느 때든 한 가지 실수라도 범한다던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이 저주는 계시되고 경고된 것으로 진노와 파멸을 가져온다. 저주는 모든 악에 대하여 각각 적용된다. 이 저주는 모든 죄인들, 곧 모든 인간들을 치는 강력한 힘과 권세와 효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면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인 것이다. 이 의인을 율법으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지만 사도는 우리에게 이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준다. 그것은(그가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기이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므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감당하셨다. 그가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선물이 되시었다. 즉 그는 모세의 율법이 특별한 낙인을 찍은 것이며 불쾌히 여길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죄를 없이하고자 선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이었다(신 21:23). 예수께서 자기를 드리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 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가 되고 특히, 복음 시대를 위하여 예비해 준 성령의 놀라운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은 율법에 자신들을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죄인으로서 우리가 받았어야 할 비참한 경우를 기억하자.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는 또한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처해 있었을 것이다.

2.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자.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담당하시려고 또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복종하셨다.

3. 그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한 미래를 전망하도록 하자. 우리는 저주를 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4.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절). 이러한 말씀이 언급된 것은 하박국 2장 4절로 거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이 다시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인용되고 있다. 하박국 2장 14절의 말씀의 의도는 참된 삶을 소유하며 죽음과 진노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의 가호를 입어 생명으로 복귀됨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이어야 하며 또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그를 위하여 살 수 있을 때만이 이러한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며, 이후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임을 또한 제시해 주고자 한다. 그 까닭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혹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할지 몰라도 적어도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없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이었다(레 18:15). 율법은 삶을 얻는 조건으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우리의 의인은 새로운 가르침 아니고 복음시대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세워지고 가르쳐진 것임을 밝히려 한다. 믿음이야 말로 진정 어느 죄인이건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고 또는 의롭게 되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이다.

Ⅳ.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의 불변성을 주장한다. 이 계약은 모세의 율법의 주어짐에 의하여 취소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15절 이하).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율법보다 앞선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약속에 근거하여 세운 것이었고, 또 약속은 믿음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8절). 그리고 이 계약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계약이 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계약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는가 또는 합의 조항이 인준되면 양편이 다 묶이게 되면 이미 다른 길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있어진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디아데케’ - 즉 계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계약이라기보다 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언이 효력이 있기 위하여서는 유언자가 죽어야 하며 그가 죽은 후에 유언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유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확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상속 인물이 없기 때문에 유언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16절) 거기에 대하여서는 그런 염려를 안 해도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 그러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체결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매우 놀랍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 계약이 오직 유대 백성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라고 한다. 즉 "자손을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단수로 표시한 것을 보아 그 말씀은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고 그 자손이 곧 그리스도라"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아직도 효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영원히 거하시며, 또한 믿음으로 그의 것이 된 영적 자손들 속에서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이 행위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그 율법이 계약을 폐할 수 없다면 또한 율법 속에 믿음이나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변한다(18절). 그러므로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일 후에 있어진 한 행위가 약속을 폐기한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롭게 되는 길을 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지혜와 신실하심에 불일치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에 유업이 주어졌고 이로 인하여 그의 영적 자손에게 물린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거두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처럼 후회할 일을 행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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