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원문 강해

[헬라어 원어성경 고린도전서 복음 말씀] 십자가 도의 능력(고전 1:18-25)

엘벧엘 2021. 12. 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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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 복음이란 능력이며 구원받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복음을 모르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예수님만을 높이기 때문에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도의 능력(고전 1:18-25)

 

18절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루 토이스 멘 아폴뤼메노이스 모리아 에스틴 토이스 데 소조메노이스 헤민 뒤나미스 데우 에스틴

=====1:18

 십자가의 도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스타우루'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앞절에 있는 '말의 지혜'와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결국 그가 여기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한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 '멸망하는'의 헬라어 '아폴뤼메노이스'와'구원을 얻는'의 헬라어 '소조메노이스'는 둘 다 현재 분사형으로 쓰여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적으로 일어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말은 '멸망하고 있는 자에게'와 '구원 얻고 있는 우리에게'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구원을 과거의 사건(롬 8:25), 현재의 상태(엡 2:5) 및 과정(고전 15:2), 미래의 결과(롬 1:9) 등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원이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임을 설명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구원을 멸망과 대조하여 구원 얻은 자들이 복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이라 - 본 구절은 롬 1:16과 동일한 표현으로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앞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켜 강조한다(고전4:20).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가리키며, 헬라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써의 생명력을 의미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뒤나미스'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절 게그랍타이 가르 아폴로 텐 소피안 톤 소폰 카이 텐 쉬네신 톤 쉬네톤 아데테소

=====1:19

  기록된바...폐하리라 하였으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LXX)를 인용하고 있다. 다만 70인 역에서 '가리워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립소'가 본절에서는 '폐하리라'의 헬라어 '아데테소'로 대치되고 있다. 이사야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인간이 입술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멀리 떠났으므로(사 20:13)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가리워진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자신의 논쟁에 적용시킴으로써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 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지혜'와 '총명'은 차이가 별로 없으나, 의미상 전자는 뛰어난 마음 상태를 뜻하며 후자는 어떤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적 판단력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대적이고 의존적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20절 푸 소포스 푸 그람마튜스 푸 쉬제테테스 투 아이오노스 투투 우키 에모라넨 호 데오스 텐 소피안 투 코스무 투투

=====1:20

  지혜있는 자가...선비가...변사가 어디있느뇨 -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명확히 한 후,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바울이 헬라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22절). '선비'의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서기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막 23:2;눅 20:39;행 19:35),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teacher of the law, NIV)를 지칭하기도 했다.이 용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가 적절한 단어였다. 또한 '변사'의 헬라어 '쉬제테테스'는 무슨 문제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동시에 지칭한다. 이러한 용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의 헬라어 '코스무'는 앞 구절의 '세대'(아이오노스)와 동의어로 원래 질서 정연한 배열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비기독교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아니뇨'(우키)는 '우'('아니')의 강조형으로 본절에서는 의문문 초두에 사용되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수사적 의문문이 되었다.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의 지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1절 에페이데 가르 엔 테 소피아 투 데우 우크 에그노 호 코스모스 디아 테스 소피아스 톤 데온 유도케센 호 데오스 디아 테스 모리아스 투 케뤼그마토스 소사이 투스 피스튜온타스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소피아 투 데우'는 '하나님의 지혜로' 혹은'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등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2) '하나님의 지혜의 드러남 가운데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의 해석을 따르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의미이다. 또한(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나(롬 1:20) 세상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 가운데 (2)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데, 이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사람이 비록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지식을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분명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빛 가운데서도 눈이 먼 상태로 있고 자신의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롬 1:28).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 '전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뤼그마토스'는 선포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선포하는 내용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전하는 행동 자체보다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었던 바(롬 16:25) 바울은 이러한 복음 전파가 '미련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기독교의 전도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친다.

22절 에페이데 카이 이우다이오이 세메이온 아이투신 카이 헬레네스 소피안 제투신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마 12:38;16:1;막 8:11,12;요 6:30).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없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23절 헤메이스 데 케륏소멘 크리스톤 에스타우로메논 이우다이오이스 스칸달론 헬레신 데 모리안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본 구절은 앞 구절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헬라어 본문에 있는 '데'('그러나')는 본절이 앞 구절과 대조를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고, 주격 대명사 '헤메이스'('우리')가 사용되어 행위의 주체자를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타우로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가리키고 지금도 그 대속적인 효과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모욕(侮辱)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다(롬 9:33;벧전 2:8).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말하고 있다.

24절 아우토이스 데 토이스 클레토이스 이우다이오이스 테 카이 헬레신 크리스톤 데우 뒤나민 카이 데우 소피안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원어 '클레토이스'는 단순히 외형적으로만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과적으로 적용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울은 '부르심'의 사상을 강조한다. 자연인으로 있을 때는 누구나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며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과 지혜를 헛된 것으로 돌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25절 호티 토 모론 투 데우 소포테론 톤 안드로폰 에스틴 카이 토 아스데네스 투 데우 이스퀴로테론 톤 안드로폰 에스틴

=====1:25

  하나님의 미련한것이...사람보다 강하니라 - 인간이 교만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일축했지만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다.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이다.

[헬라어 성경말씀 로마서 강해] 썩어질 우상에게 절하는 이방 종교(롬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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